주만은 남복을 입은 채로 그대로 쓰러져 털이의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돌아누워 버렸다.
이윽고 그 어깨가 덜먹덜먹한다.
"아이 저를 어째. 아가씨가 우시는구먼."
털이는 딱하다는 듯이 제 혼자 종알거렸으나 무엇이라고 달래야 옳을지 몰라 매우 난처해한다.
털이는 제 아가씨의 성미를 잘 안다. 싹싹할 때에는 연한 배 같지마는 한번 역정을 내면 물불을 헤아리지 않는다. 만일 어설피 달래었다가는 또 무슨 벼락을 만날는지 모른다. 아까만 해도 '듣기 싫다'는 불호령을 받지 않았느냐. 주만의 어깨는 갈수록 더욱 사납게 들먹거린다. 필경엔 훌쩍훌쩍하는 울음 소리를 내고야 만다.
이젠 무슨 벼락이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제 아가씨를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주만의 어깨는 부들부들 떨린다. 털이는 손을 들어 그 어깨를 흔들려다가 말고 한숨을 휘 내쉬었다.
그 한숨 소리를 들었는지 주만은,
"왜 이렇게 가까이 왔니. 저리 가려무나."
볼멘소리나마 아까처럼 날카롭지는 않다.
"아가씨 아가씨, 왜 우십시오. 진정을 하시고 무슨 말씀이든지 하십시오. 쇤네가 죽기 한사하고 아가씨의 원을 풀어 드릴 테니."
털이도 덩달아 울먹울먹하며 등뒤에 대고 간곡한 목소리를 떨었다.
"울기는 누가 울어."
주만은 역시 돌아보지도 않고 되받았으나 울음을 그치려고 애를 쓰면서도 말소리는 여전히 껄떡인다.
"안 우시면 왜 돌아누워 계십시오. 쇤네를 좀 보십시오. 이것 보십시오. 이 새옷이 죄 꾸겨집니다. 자 바로 좀 누우십시오."
"그까짓 옷이야 좀 꾸겨지면 어떠냐."
"어유 그 옷이 이만저만한 옷입니까. 한 벌 다시 장만하려면 돈이 얼마나 드는뎁시오."
"그까짓 돈 드는 걸 누가 아니. 꾸겨지면 안 입으면 고만 아니냐."
"웬걸입시오. 앞으로 이 옷 쓰일 때가 많을걸입시오."
"내게 남복이 당하냐. 오늘 밤에 꼭 한 번 쓰려 하였더니만……."
"오늘 밤만 날인갑시오. 앞으로도 이런 밤이 얼마를 올걸입시오."
털이의 말이 그럴듯하다는 듯이 주만은 눈물을 거두고 일어앉아 웃옷의 구김살을 편다.
눈물방울이 아직도 그렁그렁한 주인의 눈을 바라보며 털이는 '옳지!' 하고 제 무릎을 제가 친다.
"쇤네가 좋은 꾀를 하나 생각해 드릴깝시오."
"네 따위가 무슨 좋은 꾀가 있을라구."
"왜요, 쇤네가 이래봬도 꾀주머니랍시오. 그만 일에 우시다니. 내일은 세상없어도 쇤네가 불국사엘 뫼시고 갈 테니……."
"또 내일……."
주만은 재우쳤다. 또 내일! 과연 그에게는 여러 해포나 되는 듯싶다. 어젯밤에 날이 밝기를 기다린 그가 아니냐. 그러나 낮에는 더더군다나 몰래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오늘 밤에는!"
그는 또다시 밤을 기다린 것이다.
단 하루 해를 보내기에 삼사월의 해가 길기도 길었지만, 그에게는 백날 천날이 넘는 듯하였다. 그야말로 일일이 삼추 같은 이 길고 긴 해 동안에 궁리궁리해 낸 것이 남장을 차리고 털이를 데리고 불국사를 찾아가려는 것이었다.
밤이 든 뒤에는 또 집안 사람들이 잠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 밤의 몇 시각은 낮보다도 더욱 길고 더욱 지리하였다.
남장을 갖추고 털이를 깨워 일으키고 막상 길을 떠나려 하니 어느 결에 달은 지고 캄캄칠야에 불 없이는 댓 자국을 내어디딜 수 없었다.
이십 리나 되는 밤길을 걸어간다는 것도 여간 큰일이 아니었다.
이 뜻하지 않은 난관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기다렸던 오늘 밤에도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매 참고 참았던 것이 그만 울음으로 터지고 만 것이다. 금이야 옥이야 자라난 그는 난생 처음으로 제 뜻대로 안 되는 일도 있는 줄 알았다.
"내일이라도 뭐 얼마가 남았납시오. 고대 밤이 밝을 것을."
털이는 달래기 시작한다.
"내일이면 무슨 좋은 수가 있니. 어디 말을 좀 해보렴."
털이는 주만의 귀에 입을 대었다.
"저 내일 마님을 조르십시오. 불국사에 불공을 올리러 가시자구요."
"기껏 좋은 꾀라는 게 그게야."
"아닙시오. 쇤네 말대로만 하심 꼭 됩니다. 왜 아드님이 없지 않습시오. 이번 상감마마께서도 석불사에 공을 들여 동궁마마를 보시지 않으셨납시오. 자꾸 동생을 하나 낳아 달라고 조르십시오. 불국사는 새로 중수를 한 절이요, 그 부처님이 더 영검이 계시다고 조르시면 될 것 아닙시오."
주만은 그윽이 고개를 끄덕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