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에서 돌아온 날 밤을 주만은 뜬눈으로 밝히었다.
눈만 감으면 그 안타까운 석수의 모양이 선연하게 눈시울 속으로 들어선다. 처음 왕께 알현할 제 어색하던 그 모양이 떠올랐다. 어찌할 줄을 모르고 허전허전하던 그 눈매가 무엇이라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땅바닥에 거의 닿을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광경도 우스웠다.
주만은 제 옆에 마치 그 석수나 있어서 놀려먹는 것처럼 생글생글 웃어 가며,
"이렇게." 하고 베개에 제 이마를 푹 파묻어서 흉을 내보이었다.
탑을 돌 제 그 꿈꾸는 듯한 느린 걸음걸이, 회오리바람같이 달음질을 치던 그 열정 가득한 행동들이 어른어른 눈앞에 지나간다. 달빛으로 더욱 희게 드러난 코, 그 열이 오른 듯한 붉은 입술이 한량없이 그리웠다. 그 청청한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나는 듯 나는 듯하다…….
첫여름 밤은 고요하다. 창 밖은 실바람도 불지 않는지 잎사귀 하나 간댕하지도 않는 듯. 찌잉 하고 귓속만 우는데 문득 사푼 하는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다.
주만은 귀를 기울였다. 갈 데 없는 인기척 소리다. 그 발자국은 가만가만히 걷는 듯 마는 듯 제 방 가까이 와서 사라진 것 같다. 몰래몰래 들어온 사람의 입김이 완연히 문풍지에 서리듯.
"그가 왔고나, 그이가 왔고나." 머리도 없고 끝도 없이 주만의 가슴에는 이런 환상이 번개같이 일어났다.
그는 이불자락을 제치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쏜살같이 문을 열어젖히려다가 말고 제 생각이 너무 헛되고 어림없음을 깨닫자 춤추는 촛불 아래에서 호젓하게 혼자 웃었다.
초도 벌써 다 닳아 옥촉대 밑바닥에 촉농이 켜켜이 앉았다.
주만은 새 초를 한 자루 꺼내서 다시 붙이었다.
그도 이 밤에 잠자기는 단념한 것이다.
그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환상은 꼬리에 꼬리를 맞물고 한번 사로잡은 제 아름다운 포로를 놓치려 들지 않았다.
저와 그가 정면으로 마주칠 때 흑 하고 그가 제 앞으로 몇 걸음 다가들던 광경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는 왜 나를 보고 그렇게 놀랐을까. 그의 얼굴엔 반가워하는 빛이 역력히 움직이었다. 곧 나를 부둥켜안기나 할 듯이 달려들 제 그의 눈은 이상하게 번쩍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돌아서 버린 것은 무슨 곡절일까.
그도 분명히 나를 알아본 것이다. 내 마음을 알아본 것이다. 내 속을 꿰뚫어본 것이다. 그런 놀라운 재주를 가진 그이거늘 어찌 조그마한 여자의 흉중을 살피지 못할 것이랴.
그렇다면 나를 사람으로 여겼을까. 단 한 번 먼빛으로 보고 그대로 마음을 쏟아 버린 나를 상없다고 하지나 않을까.
주만은 이불을 뒤집어쓰고도 누가 곁에서 보기나 하는 것처럼 얼굴을 붉히었다.
"아이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혼자말로 속살거리고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갔다. 그러고도 미협한 듯이 이불 속에서 또다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었다.
그러나 부끄러운 생각도 잠시 잠깐이다. 타오르는 정열은 걷잡으려야 걷잡을 수 없었다.
그도 나를 생각하는지 모르리라. 그도 나를 그리며 이 밤을 꼬박이 새우는지 모르리라. 그렇게 반가워하다가 그렇게 물러선 것은 그의 정과 의젓한 것을 한꺼번에 알리는 듯도 싶었다.
온몸이 끓고 얼굴이 확확 달아서 뒤덮었던 이불자락을 걷어찼다.
암만해도 그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다. 그립고 그리워 참으려야 참을 수 없다. 주만은 마침내 또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이 밤으로 아사달에게 뛰어가고 싶었다. 세상없어도 만나고야 말고 싶었다. 당장 이 시각에 그를 보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다.
벗었던 옷까지 다시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주만은 살그머니 창문을 열었다. 제 갈 길을 미리 보아나 두려는 것처럼.
선뜩한 밤공기는 그의 불같이 타는 뺨을 씻어 준다.
벽오동의 너푼너푼한 잎사귀에 다 기울어진 조각달이 뉘엿뉘엿이 걸렸다.
주만은 이윽히 지는 달을 바라보고 있다가 제가 저를 타이르듯이 소곤거렸다.
"내일 날이 밝거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