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019

"털아 털아, 얘 털아."
주만은 아까부터 가쁜 듯이 털이를 깨우고 있었다. 털이는 앙바툼한 다리를 큰대자 모양으로 퍼더버리고 입 가장자리에 침을 깨 흘리며 곤하게 잔다.
"얘, 털아 좀……."
주만은 털이의 팔뚝을 잡아 뒤흔들며 귀에다 대고 소리를 딱새같이 질렀다.
털이는 "응, 응" 잠꼬대를 하고 흔들린 팔뚝으로 숭숭 맺힌 제 이마의 땀을 문지르고는 다시 돌아누워 버린다.
"얘, 얘 좀 일어나거라. 일어나요."
깨우는 이는 바작바작 애가 마르는 듯. 자는 이는 꿈적꿈적 몸을 움직이는 듯하다가도 이내 쌕쌕 코고는 소리를 낸다.
"얘, 어서 좀 일어나. 원 잠귀도 이렇게 어두운가. 털아, 털아!"
주만은 돌아누운 털이의 어깨를 이리로 잡아 제치며 짜증을 낸다.
"녜 녜."
털이는 코로 대답만 할 뿐이요 그저도 잠을 못 깬다.
"얘, 좀 얼른 일어나라니까. 얼핏, 얼핏 좀 일어나."
이번에는 깨우는 이가 입술을 쪼무리고 옷이 수세미같이 말려 올라가서 벌겋게 드러난 자는 이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이래도 못 일어날까, 이래도 못 일어날까, 털아, 털아."
"아야! 녜."
하고 털이는 별안간 나는 듯이 일어나 앉는다. 그제야 자는 이는 주인이 깨우는 줄 알고 질겁을 하며 일어난 것이나 아직도 잠은 덜 깨어서 연상 조여붙는 눈을 비빈다.
"얘, 정신을 좀 차려, 좀."
주만은 힘없이 끄덕이는 털이의 머리를 사납게 휘술레를 돌리며 재우친다.
털이는 또 한참 주먹으로 눈을 비비고 닦고 나더니 발그스름하게 잠발이 선 눈으로 어색하게 웃어 보인다.
"얘, 무슨 잠이냐. 그래도 잠이 깨지를 않니."
"왜, 안 깨긴요. 벌써 깬걸입시오."
"그렇게 불러도 일어나지를 않으니."
"아마 깜박 잠이 들었던가 봐요, 헤헤."
깬 이는 무안한 듯이 또 한번 웃는다.
"깜박 든 게 다 뭐야. 그렇게 사람의 애를 태워."
주만은, 깨우느라고 진땀을 뺀 것이 아직도 성이 풀리지 않은 듯 털이를 노려본다.
"원, 원수엣년의 잠이!"
하고 털이는 제 머리를 제 주먹으로 몇 번 쥐어지른 뒤에,
"그저 죄송합니다. 무슨 심부름을 하랍시오."
절이라도 할 듯이 사죄를 하고 착착 붙인다.
"왜 또 알찐거리기는! 어서 옷이나 입어요."
주만은 내던지듯 명령을 내리었다.
"왜요. 무슨 큰일이 났어요."
털이는 그제야 확실히 잠이 깨며 저도 놀란 듯이 서둔다.
"어서 옷이나 입으라니까."
털이가 발딱 일어나 부산하게 속옷의 구김살을 펴고 치마를 떼어 입고 버선을 신는다.
"누가 그 옷 말야."
주만은 털이의 다 해진 치맛자락과 깜둥족제비가 된 버선목을 바 라보다가,
"나들이옷을 입어요. 어디 좀 갈 데가 있으니."
다시 영을 내렸다.
"어디를 갑서요. 벌써 날이 다 새었납시오."
"얘 잠꼬대 작작 해라. 무슨 날이 벌써 새니. 아직 자시도 안 되었을걸."
"네! 아직 자시도 안 되었납시오. 그러기 첫잠이 깜박 들었던 거야. 첫잠이 들면 동여 가도 모른다고 하는걸입시오."
털이는 기어코 제가 잠을 얼른 못 깬 변명을 하고야 만다.
"어서 새옷을 좀 갈아입어요. 제발 좀."
주만은 울 듯이 재촉을 한다.
"아니 자시라면 한밤중 아녜요. 이 밤중에 어디를 가시랍시오."
하고 자던 이는 그 토끼 같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뜬다.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도 인제야 깨달은 모양이다.
"수다 고만 좀 떨어요. 나 가자는 대로 가면 고만 아니야."
주만은 전에 없이 황황해한다. 털이는 입을 아 벌린 채 수상쩍다는 듯이 제 아가씨의 기색을 살피었다. 홰를 올리고 거물거물하는 밀초 불빛에도 제 아가씨의 얼굴이 이글이글 타는 듯이 붉은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새까만 눈썹 위에도 심상치 않은 기운이 떠돈다. 더구나 그 옷맨드리를 보고 놀랐다.
주만은 남빛 반비를 입고 수놓은 비단바지를 입고 갈 데 없는 귀공자로 차리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