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018

탑을 도는 아사달의 발길은 느리게 지척거린다.
그날 밤 아내와 지내던 정경이 그림자등〔影燈〕에 어른거리는 환영처럼 뚜렷이 비추인다.
그들은 마침내 그날 밤을 꼬박이 밝히었다. 서로 어서 자라고 권하고 조르면서 저마다 모를 사이에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들이었다. 서로 외면을 하고 등을 졌다가 어느결엔지 뚫어지게 마주보고 있는 그들이었다. 분명히 떨어져 누웠는데 언뜻 깨달으면 두 뺨을 마주 비벼대는 그들이었다…….
이별을 아끼는 밤은 너무도 짧고 너무도 헤프다.
어느덧 아침이 되었다. 아내는 아침밥을 지으러, 남편은 미진한 행장을 꾸리러 이 방을 나가는 수밖에 없다.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 먼저 일어선 아내가 방문 앞까지 나가다가 다시 돌쳐서서 서너 걸음 도로 들어온다. 그는 작별인사를 잊었던 것이다. 길 떠날 시각이야 아직도 얼마 남았지만 그들 단둘이 하는 작별은 이 자리가 마지막이 아닌가.
"부디 안녕히 다녀오셔요."
"부디 잘 있소."
"부디 대공을 이루셔요."
"그야!"
하고 아사달의 젊은 눈동자는 자신 있게 번쩍이다가,
"장인이 저렇게 늙고 편찮으시니……."
하고 얼굴을 흐린다.
아내는 무슨 긴히 부탁할 말이 있는 것처럼 나붓이 다시 앉는다.
"그런 걱정을랑 조금도 마셔요. 내가 어쩌든지 모시고 꾸려 갈 테에요. 몇 해가 걸리든지 부디 대공만 이루셔요."
하고 얼굴빛을 바루며 단단한 결심을 보이었다.
"부디 대공만 이루셔요."
나직하나 힘있던 그 말소리! 지금도 아사달의 귀를 울리고 마음을 울린다. 안타까운 이별도 애달픈 그리움도, 남편의 재주를 빛내고 이름을 이루기 위하여 즐기어 견디려는 그 씩씩한 태도! 언제 생각해 보아도 든든하고 고마웁고 눈물겨웁다.
아직 철부지로 알았던 아내가 어느 틈에 그렇게 장성해졌을 줄이야. 물보다 더 무른 줄 알았던 그 마음이 그렇게 여무질 줄이야.
생각할수록 새록새록이 아내가 그리웁다.
예쁘고 의젓한 아내! 그리운 그 얼굴을 단 한 번 눈 한 번 깜짝일 짧고 짧은 동안에나마 보여 준다면 그는 목숨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았으리라.
마지막으로 아내를 보던 애틋한 정경 한 토막이 또 서언하게 나타난다…….
여러 동무들에게 옹위되어 사립문 밖까지 나왔다. 병중의 장인도 기침을 쿨룩쿨룩하면서도 지팡이에 몸을 버티고 지축지축 따라나온다.
그는 재빠르게 눈을 사방으로 돌렸다.
"이젠 아주 정말 길을 떠나는구나."
하매, 거기까지 범연히 나온 그도 다시 한번 아내의 얼굴이 더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내의 얼굴은 거기 없었다. 별안간 큰 쇳덩이가 발목에 매어달리는 듯 걸음이 내켜지지 않았으나 마음을 도지게 먹고 일부러 쾌활하게 땅을 쾅쾅 구르는 듯 걸었다.
길 모퉁이를 도는 데 왔다.
"인제 고만 들어가십시오."
아사달은 걸음을 멈추고 스승에게 더 따라나오기를 말리었다.
"응, 그래 그럼 잘 다녀오너라, 쿨룩쿨룩. 머 먼길에 몸조심하고, 쿨룩쿨룩. 원 몹쓸 기침이……."
튀 하고 가래침을 배앝는데 그 늙은 눈에 눈물이 걸씬걸씬한 것은 한갓 기침 탓만 아니리라.
"네."
하는 아사달의 대답도 목이 메이었다.
무릎을 꿇고 마지막 작별 절을 하고 일어서면서 언뜻 제가 지금 나온 사립문을 바라보았다.
돈짝만큼씩 한 새 잎사귀가 파름파름하게 돋아나는 느티나무 밑에 아내가 외로이 서 있지 않은가. 여럿이 우 나올 때에는 부끄러워서 같이 따라 못 나오고 뒤미처 쫓아나온 것이리라.
슬쩍 한번 오고 간 두 눈길! 이것이 마지막 이별이었다…….
"아사녀, 아사녀!"
아사달은 소리를 내어 가만히 불렀다. 그 이름이나마 입술에 올려보고저.
발은 제 돌던 자국을 찾아 제대로 돌아가건마는 아사달의 마음이 탑돌기를 떠난 지는 벌써 오래다.
"아사녀, 아사녀!"
그는 또 한번 불러 보았다.
아내는 완연히 제 앞에 와 서는 듯하다.
하늘만 쳐다보던 환상에 싸인 눈을 앞으로 돌릴 제 과연 제 아내는 제 앞에 어엿이 서 있다!
일순간 꿈이 현실로 나타날 때 그는 흑 하고 놀란 것이다. 한 걸음 바싹 더 다가들며 똑똑히 제 아내의 얼굴을 살피매, 그는 물론 제 아내가 아니었다. 제 아내 낫세만한 다른 여인이었다.
설레던 정신을 수습하고 다시 탑돌기를 시작하였건만, 한번 어지러워진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무엇에 쫓기는 듯이 제 처소로 돌아와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