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015

아사달은 지긋지긋한 생각을 쫓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설마 죽기야, 설마 죽기야." 그는 제 자신이 알아듣도록 뇌고 또 뇌었다.
사람이란 슬프다고 간 대로 죽는 것은 아니다. 설령 아버지가 죽었다 하기로서니 딸마저 죽으리라고 단정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생각이리라.
그러나 이렇게 돌려 생각해 보아도 그의 걱정은 놓이지 않았다. 만일 장인이 죽고 아내는 살았다 해도, 더욱 그의 애를 졸이게 하는 또 다른 켯속이 있기 때문이다.
남편도 이별하고 어버이조차 여읜 괴로운 딸과 아내! 그 고단한 신세를 엿보는 이리떼 같은 부석의 제자들이 마음에 켕긴다.
그 중에도 우두머리 가는 팽개(彭介)의 모양이 언뜻 보인다. 그 후리후리한 키와 감때사나운 상판이 엎어누를 듯이 쑥 나타난다. 그 얼굴은 능글능글하게 웃는다.
그는 아사달보담 나이도 네 살이 위요, 부석의 문하에 들어오기도 아사달보다 일 년이 먼저였다. 집안이 그리 궁색하지 않은 탓으로, 제자들 가운데 차림차림도 가장 말쑥하였고 잔돈푼도 곧잘 써서 동무들의 마음을 사기도 하였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가난한 스승의 살림도 가끔 도와 주는 듯하였다.
재주는 무디었지만, 나잇값과 돈냥 덕으로 여러 동무를 휘두르고 한동안은 어엿한 수제자로 내남없이 허락하였던 것이다.
드러내 놓고 말은 안 했으되, 수제자가 된다는 것은 곧 어여쁜 아사녀의 신랑감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늙어 가는 스승도 든든하고 넉넉한 팽개와 같은 사위를 얻어 노경을 의탁하려 하였는지 모르리라.
그러나 한해 두해 지나갈수록 아사달의 재주와 솜씨는 너무도 뛰어났다.
예술을 생명으로 하는 부석의 사랑은 마침내 아사달에게 쏟아지게 되었다.
이 눈치를 챈 팽개는 푼푼한 나머지 울분한 생각을 꽃거리에 풀기 시작했다. 그런 소문이 들릴수록 스승의 눈 밖에, 더군다나 장래 장인의 눈 밖에 나게 되었다.
빛나는 승리는 아사달에게 돌아오고야 말았다. 뭇제자의 부러워하고 시기하는 눈총을 맞으면서 아름다운 아사녀의 남편이 된 것이다.
아사달이 기쁨의 절정에 올랐다면 낙망의 구렁에 천길 만길 떨어지기는 묻지 않아도 팽개이리라.
그러나 팽개는 그런 사색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
혼인날에도 다른 제자보담 오히려 더 일찍이 와서 모든 일을 총찰하였고, 모꼬지〔宴會〕 자리에서도 가장 기쁜 듯이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즐기었다.
아사녀를 앗기었으니 팽개는 이제 스승의 문하에 발을 끊으리라 하는 것이 여럿의 일치한 공론이었으나 팽개는 여상스럽게 출입을 할 뿐 아니라, 도리어 전보담도 더 성건하게 다니었다.
그의 배짱은 수수께끼였다.
하루는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키다리 장달(長達)이란 제자가 그 꾸부정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앉았다가 팽개를 보고 무두무미하게,
"원 자네는 비윗장도 좋아." 하고 놀리는 가락으로 말을 툭 내던졌다.
"이 짜디짠 친구가 이건 또 웬 수작이야. 어째 내 비윗장이 좋단 말이냐."
팽개가 되받으니까, 장달은,
"나 같으면 벌써 발그림자도 않을 텐데…… 그래도 못 알아듣겠니. 이 될뻔댁야."
하고 히히 웃어 버린다.
"응, 그 말이야. 그러면 계집 뺏기고 스승마저 잃어버리게, 허허."
하고 팽개는 아사달을 향하여 능글능글하게 웃어 보이었다.
그 능글맞은 웃음이 아사달에게는 도무지 잊혀지지를 않았다. 웬일인지 그 웃음이 무서웠다. 소름이 끼치었다.
지금도 탑을 돌며 멀리 아내의 신상을 생각할 제, 그 흉물스러운 웃음이 나타나고야 만 것이다.
"이놈 아사달아, 이걸 좀 봐라, 허허."
팽개는 앙탈하는 아사녀를 두리쳐 끼고 역시 그 흉한 웃음을 웃어 보인다.
"내가 왜 이런 불길한 생각만 하는고."
아사달은 진저리를 치며, 제 앞에 그린 환영을 떠다 박지르듯이 팔을 내저으며 급히 걸어 보았다. 그래도 불길한 환영들은 꼬리를 맞물고 굳이굳이 떠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