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만과 털이는 돌아섰다.
앞지르는 것이 과연 묘안은 묘안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수월한 노릇은 아니었다. 궁금하던 그의 앞모양과 얼마든지 마주칠 수는 있었건만 딱 맞닥뜨릴 뻔하다가 슬쩍 옆으로 비킬 적마다 주만의 가슴은 못 견딜 만큼 뛰논다.
아까는 뒤밟는 동안이 떴다가 줄다가 하더니 이번에는 그들의 매암 도는 둘레 사이가 멀어지고 좁아들고 하였다.
저 둘레와 이 둘레가 차차 차차 다가들어 두 둘레가 한 둘레로 어우러질 만하면 다시금 멀리멀리 갈리어 나간다.
너무 멀어지면 안타까웁고 너무 좁아들면 숨길이 막힐 듯하고…….
주만의 이마에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맺히었다. 새빨간 뺨은 농익은 홍시처럼 아늘아늘 터질 듯하고 가쁘게 내쉬는 단 김에 호끈호끈 입술이 마른다.
곁에서 보기에는 허청허청 탑의 둘레를 도는 것이 어렵지 않아 보였지만 막상 돌아 보니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다.
인제는 눈이 핑핑 내어둘리고 머리까지 어찔어찔하다. 그래도 주만은 이를 악물고 돌고 또 돌았다.
"아이 사람 죽겠네. 아이 사람 죽겠네."
털이는 쌔근쌔근하면서도 연해 잔소리를 재우치며 땀을 빡빡이 흘린다.
달을 가리었던 구름장은 어른어른 지나간다. 가닥가닥이 풀어지고 엷어져서 마지막엔 뿌유스름한 김처럼 달 얼굴에 서리었다가 이내 가뭇없이 사라졌다.
거물거물하던 그늘과 빛이 뚜렷해졌다. 탑신이 은물에 적시어 놓은 듯 불현듯 번쩍인다.
어느결엔지 또다시 같은 둘레를 돌고 있던 아사달과 주만은 거의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었다.
그들의 상거는 너댓 걸음밖에 남지 않았다.
하늘만 쳐다보고 있던 아사달이 갑자기 무엇을 찾는 듯이 제 주위를 둘러본다.
달빛을 안고 흰 꽃송이처럼 피어난 주만의 얼굴에 아사달의 시선은 떨어졌다.
그 찰나! 아사달의 걸음은 주춤하고 멈춰졌다. 놀람과 반가움이 뒤섞인 표정이 한순간 그 꿈꾸는 듯하던 눈자위에 떠올랐다. 흑! 하고 앞으로 고꾸라질 듯하며 한 발자국 내어디디자 아사달의 눈은 불같이 빛났다. 한참 주만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그 다음 순간에는 정신을 모으는 듯 눈을 감아 버린다.
주만도 별안간 변한 아사달의 거동에 깜짝 놀랐다. 뜨거운 저편의 눈길에 동여매인 듯 주만이 또한 그 자리에 딱 발길을 붙인 채 손끝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온몸의 피까지 돌기를 그치고 그대로 얼어붙어 버린 듯, 오고 가는 두 시선만 불꽃을 날리었다.
그때였다. 재 올리는 구경이 한 고비가 넘었는지 법당에 몰리었던 젊은이 축들이 떼를 지어 와 하고 쏟아져 나온다.
"아이 여기는 시원도 해라. 법당 속은 바로 도가니 속이야!"
"이런 줄 알았더면 진작 나올 것을."
"어디, 어디를 가볼까."
"이 마당 끝까지 가보지." 제각기 지껄이며 뜰을 내려온다.
"우리 저 솔숲으로 가볼까."
"까막나라에 뱀이나 있으면 어떡하게."
"뱀이 무슨 뱀이야."
"여길 나오니 달도 밝구먼."
"저기 다보탑이 보이네."
"저것 보아, 저 다보탑 밑에 사람 셋이 섰네."
"하나는 남자고 둘은 여자고."
"한 남자와 두 여자! 찐답잖은 일인걸."
"하하하."
"하하하." 구슬을 깨는 듯한 웃음 소리가 달 그늘로 사라진다.
"달도 희고 임도 희고……."
누가 노래 웃꼭지를 딴다.
"저것 좀 봐요. 남자가 두 여자를 버리고 저리 돌아가네."
"어느결에 안타까운 이별인가."
"초승반달이 지기도 전에."
"오호호."
"오호호."
웃음 소리를 먼저 보내며 그들의 춤추는 듯한 달뜬 발길이 탑을 향해 걸어온다.
"참 재 올리는 구경에 팔려서 탑 도는 걸 잊었네."
"옳거니 오늘이 파일이거니, 발원을 올려야지."
"발원이면 무슨 발원?"
"나라가 태평토록."
"오곡이 풍등하게."
"성수가 무강토록."
"늙으신 부모 궂기지 말게."
"효녀 충신 많으시군."
"알뜰한 내 발원은 고운 님 만나나 뵙게, 오호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