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012

주만은 이때처럼 털이가 반가운 때는 없었다. 백만의 응원병이나 얻은 듯이 든든하였다.
"오, 털이냐. 너 참 잘 나왔구나. 이것 봐, 오늘이 초파일 아니냐. 너와 나와 이 탑을 돌아 보자. 소원성취하게."
"원 아가씨도 급하시기는. 사람이 숨이나 좀 돌려얍지요." 하고 장히 가쁜 듯이 숨을 모두 꾸려 쉰다.
"누가 여기 와 계실 줄이야 알았나요. 한참 승무구경을 하다가 아가씨를 찾아보니 어느결엔지 계시지도 않겠지요. 온 방안을 찾아보아도 없으시고, 그래 생각다 못하여 밖으로 나왔습지요. 미친년 뽄으로 못가엘 다 가보고 산기슭도 헤매 보고 어디 계셔야지. 까막나라라 몇 번을 호방에 빠지고 참 죽을 뻔했답니다. 어쩌면 이년을 그렇게 속이셔. 후우, 아이 숨차."
찾기에 애쓰던 원정을 늘어놓는다.
"……대뜸 이 탑 생각을 했더면 좋을걸. 이 원수엣년의 대강이에 어디 그런 생각이 얼른 돌아야지……."
"얘, 수다 작작 떨고 어서 탑이나 돌자."
주만은 벌써 한 걸음 내어디디며 털이를 재촉하였다.
털이는 막 발을 떼어놓으려다가 말고 별안간에,
"에구머니나!"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주만의 손에 매어달린다. 털이는 그제야 아사달의 검은 그림자를 알아보고 깜짝 놀란 것이다.
"아가씨, 아가씨, 그 그게 누군갑시오."
털이는 더욱 달라붙으며 가슴을 발랑발랑한다.
주만은 돌아다보며 손을 저어 아무 소리도 말라는 뜻을 보이었다.
"게, 게 누군갑시오."
어느덧 주인의 눈치를 알아차리고 이번에는 주만의 귀가 간질간질하도록 입을 대고 소곤거렸다.
"왜 그 석수 아니시냐."
주만은 성이 가시지만 가만히 일러주는 수밖에 없었다.
"네에―---" 하고 고개를 까닥까닥하다가,
"그럼 아가씨가 혼자가 아니시군요."
하며 살그머니 제 아가씨의 얼굴을 쳐다본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는 듯이,
"그럼 쇤네는 괜히 온걸입쇼."
하며 해해 웃는다.
주만은 눈을 흘겨 보이었다.
"아가씨는 눈을 흘기시면 더 예쁘시어…… 해해."
털이는 농치듯이 또 한번 웃어 보인다.
털이는 주만의 유모의 딸이다. 나이도 다 같은 열여덟에 한동갑이요, 어려서부터 같이 자라났고 시방도 밤낮으로 몸시중을 드는 터이라, 이따금 상전과 종이라는 상하 구별을 잊어버리고 꽤 버릇없이 굴었다.
주만은 털이의 말씨가 분하고 괘씸하였으나 여기서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털이는 벌써 제 아가씨의 기색을 살피고,
"참 어서 탑을 돌아얍지요, 녜 아가씨. 자 아가씨가 앞장을 서십시오." 주만을 앞으로 떠다밀다시피 하며 서둔다.
뭉실뭉실 떠도는 구름장이 그 흐늘흐늘하는 엷은 한 자락을 펼쳐서 슬쩍 달 얼굴을 가리었다. 초승달의 약한 빛을 그나마 가리어 놓으니 사면은 어렴풋하게 조으는 듯.
네 간만큼 세 간만큼 두 간만큼! 주만과 털이의 걸음은 차차 차차 재빨라지며 가까이 가까이 아사달의 뒤를 따르며 매암을 돈다. 한 간만큼 반 간만큼! 그들의 떨어진 사이가 좁혀들었다. 앞에 가는 이의 뒤로 흔드는 손길이 뒤따르는 이의 앞으로 내미는 손길과 자칫하면 마주치게 되었다. 앞선 이의 헐레벌떡하는 숨소리가 역력히 들린다. 앞선 이의 그림자가 뒤선 이의 발끝에 밟히었다. 그 순간 그들의 거리는 다시금 멀어 간다. 한 간 두 간 세 간. 동안은 자꾸 떨어져 간다.
앞선 이도 제 뒤를 밟는 자국 소리를 분명히 들으련마는 단 한 번을 돌아다보지도 않는다. 호리호리한 여윈 뒷모양이 주만의 눈길에서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할 뿐이다.
이럴 줄 알았던들 차라리 아까 모양으로 한 자리에 서 있기나 할 것을, 떨어질 때 떨어지더라도 앞으로 지나칠 적마다 그 모습이나마 자세자세 볼 수 있었을 것을.
주만은 무엇을 잃어버린 듯 마음이 허수해진다. 무엔지 슬프고 원망스럽고 서운하였다. 다리는 맥이 다 풀리고 걸음걸이는 허전허전해진다.
"어쩌면 뒤 한 번을 돌아보시지 않을까."
털이는 제 주인의 속을 들여다보듯이 혼자말로 종알거리고 축 늘어지는 주만의 허리를 부축한다.
"아가씨, 우리 이제는 앞으로 질러가 보아요."
털이는 마침내 묘안을 내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