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011

밝은 데서 나온 까닭으로 눈이 어둠에 채 익지를 않았기도 하려니와 탑에만 정신이 쏠렸기 때문에 주만은 제 주위를 보살필 겨를이 없어, 아까부터 탑의 주위를 돌고 있는 사람을 못 보았던 것이다. 으슥한 곳에 무심한 가운데 불쑥 나타난 사람의 그림자처럼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은 없으리라.
"아!" 나직한 외마디 소리를 치고 주만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 그림자는 인기척도 외마디 소리도 도무지 못 들은 양 묵묵히 탑의 둘레를 그대로 돌아간다.
주만은 아뜩한 정신을 가까스로 바로잡자 그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또 한번 놀랐다. 그에게는 이번 놀람이 아까 놀람보다 몇 곱절 더 컸다. 가슴이 두근두근 두방망이질을 한다.
그는 제 앞으로 어른거리며 지나가는 검은 그림자야말로 다른 사람 아닌, 낮에 본 그 석수인 것을 알아보았다.
먼 불빛과 달빛이 어우러진 여름, 희미한 광선이었건만, 그 빼어난 이마와 검고 사내다운 눈썹과 연연한 입술이 또렷또렷하게 주만의 눈 속으로, 아니 가슴속으로 박힐 듯이 들어왔다.
주만은 몸을 움직이려 하였다. 그에게로 와락 뛰어달아 들든지, 그렇지 않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 버리든지 두 가지 방도 가운데 한 가지 방도를 취하려 하였다. 그러나 아까 선 그 자리에 오금이 붙어 버린 듯 발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그이는 제 길만 돈다. 별을 따려는 사람 모양으로 하늘만 쳐다보고 어느 때는 급하게 어느 때는 느리게 돌고 또 돈다. 벌써 주만의 앞을 네 차례 다섯 차례 돌아갔건마는 단 한 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나 여기 있어요."
여섯 번째 제 앞을 지나칠 때 주만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나'라 한들 그이가 '나'가 누구인 줄 알 것인가. '나'라는 사람이 그이와 무슨 알음알음이 있단 말인가.
회오리바람에 둥 뜨인 듯한 머리건만, 제 생각이 하도 어처구니없는 것을 깨닫고 어둠 속에서 호젓하게 얼굴을 붉히었다.
'그런데 저이가 왜 탑의 둘레를 자꾸만 돌고 있을까.'
주만은 차차 설레는 마음을 가라앉히자 처음에는 괴이쩍은 생각이 들다가,
'오, 옳지, 오늘이 초파일. 그에게도 무슨 발원이 있나 보다.' 하고 스스로 깨우쳐 내었다.
석가 탄일의 밤에 소원성취를 빌며 탑의 주위를 도는 풍속을 주만은 이때까지 까맣게 잊어버렸던 것이다.
'나도 저이와 같이 좀 돌아 볼까.'
이렇게 생각하매 저는 그이보담 발원할 것이 열 곱절 스무 곱절 더 많은 것 같았다.
그이가 한 번을 돌면 저는 백 번이나 천 번을 돌아도 이 크고 큰 발원에는 오히려 정성이 부족할 듯하였다.
첫째로 금시중 집과 혼인이 되지 말기를 빌고 싶었다. 아버지께서 꿋꿋하게 끝끝내 거절해 주소서, 어머니는 언제든지 제 편을 들고 역성해 주소서, 하고 빌고 싶었다.
둘째로 지금 제가 수를 놓고 있는 수병풍이 잘 되어지이다, 그리고 당나라에 보내는 선물 가운데 첫째로 뽑혀지이다, 하고 빌고 싶었다.
셋째로 이번에 빌 것이야말로 첫째 둘째보담 더 소중하고 더 엄청나고 더 어렵고 더 간절한 발원이었다.
"그러면 그것이 무슨 발원이냐."
누가 종주먹을 대고 물어도 주만은 꼭 집어서 무엇이라고 대답은 못 하였으리라.
남에게 대답은커녕 제 속생각에나마 분명치를 않았다. 물 속에 흐르는 달빛과 같이 꼭 잡아 낼 수는 없으나마, 아무튼지 안타까웁고 애달픈 발원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영롱한 무지개처럼 눈부신 발원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넘치는 봄물결과 같이 마음 가득한 발원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의 발길은 다시 가까워 온다. 달빛을 담뿍 안은 뒷머리가 검게 빛난다.
주만은 곧 그의 뒤를 따르려 하였다. 그러나 내어디디려던 발은 다시 옴츠러지고 만다. 아아 염통은 왜 뛰기만 하는고.
"에구 아가씨, 구슬아가씨, 아가씨가 여기 계시구먼."
등뒤에서 털이의 쌔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