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010

어스레하게 땅거미가 들면서부터 절 안은 더욱 북적대었다. 왕을 맞이하여 저녁재를 굉장하게 올리는 것이다.
불전마다 매어달린 가지각색의 무수한 등들이 차차 불빛이 밝아 온다. 임금님이 듭신 것을 가리키는 용무늬를 올린 청사초롱에 밀초가 부지짓부지짓 타오른다. 이 불바다에 헤엄치듯 갖은 풍악이 울려 온다.
두리둥둥 법고가 운다. 엎어치는 바라가 지르렁지르렁. 쾅쾅 태증이 억세게 고함을 지르는 사이로 가냘픈 호적이 껄떡이며 넘어간다.
법당 뒤 큰방에 임시로 옥좌를 베풀고 듭셨던 왕은 일행을 데리시고 법당에 납시어 예불을 마치시고 재 올리는 구경을 하셨다.
승무가 한창 자지러지는 판에 주만은 살그머니 총중에서 빠져나왔다.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고 골 속이 힝힝 내어둘린다. 풍악 소리도 아무 곡조도 없는 듯 잉잉 하고 시끄럽게 귀를 찢어 내는 것 같다. 재미있는 춤가락도 눈에 어지럽기만 할 따름이다.
사람이 많은 푼수로 방 안이 좁아서 공기가 울체한 까닭인가, 그 까닭도 있었다. 어느덧 첫여름이라 여럿의 땀내와 살내와 훈훈한 사람의 훈기가 그의 비위를 뒤흔든 탓인가, 그 탓도 있었다.
가마에 흔들리고 배에 흔들리고 절 음식이 맞지를 않아 저녁을 설친 때문인가, 그 때문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원인보담도 그는 저 혼자 있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조용하고 호젓한 자리가 그리웠던 것이다. 그는 아무도 없는 자리, 아무것도 안 보이는 자리,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자리가 아쉬웠던 것이다.
그는 오직 저 홀로 무엇을 생각하고 싶었다. 제 넋과 단 혼자 은밀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법당 문 밖에 나서니 선선한 밤바람이 그의 옷깃 속으로 처근처근하게 기어든다.
그는 살 것같이 눅눅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지향없이 걸음을 옮기었다.
주인과 나그네가 모조리 재 올리는 데로 몰리인 듯, 밖에는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다. 그는 불빛을 피하듯 어둑한 데로만 바라보고 발을 내어디디었다. 얼마를 걷지 않아 광선의 테 밖에 헤어나올 수 있었다. 어슴푸레한 가운데 낮에 보던 다보탑이 저만큼 보인다.
그 탑을 바라보는 찰나 까닭 없이 가슴이 찌르르해지며 눈물이 핑 돌 것 같아졌다. 이 묵묵한 돌탑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주만이 저도 생각지 못하였으리라. 그 탑은 부른다. 손짓하며 부른다. 두 팔을 벌리고 어서 오라 하는 듯하다. 째기발을 디디고 왜 늦었니 하는 듯하다.
주만은 허정허정 재게 걸었다. 그는 한순간이라도 빨리 그 품속에 뛰어들고 싶었다. 아까 눈으로만 더듬던 자국자국과 구석구석을 손으로 어루만져 보리라 하였다. 그렇듯이 고와 보이는 돌결이 얼마나 부드럽고 미끄러운가 뺨을 대고 비벼 보리라 하였다. 그 오뚝 솟은 손잡이들을 휘어잡고 그 자그마한 돌층층대를 껑충껑충 뛰어올라 가리라 하였다. 그 판판한 밑바닥에 펄썩 주저앉아 어느 때까지 어느 때까지 제 넋과 은밀한 수작을 주고받아 보리라 하였다.
처음 생각엔 거기가 고대인 줄 알았더니 걸어 보매 꽤 동안이 떴다. 더구나 서투른 길이요, 어두운 길이라 마음이 급할수록 발은 움펑진펑하여 하마터면 여러 번 고꾸라질 뻔하였다.
땅바닥을 보고 조심조심 몇 걸음을 걸어가다가 언뜻 다시 고개를 들매 초생 반달이 탑 위에 걸렸다. 그 빛물결은 마치 흰 비단오라기 모양으로 탑 몸에 휘감기어 빛과 어둠이 서로 아로롱거리며 아름다운 탑 모양은 더욱 아름답게 떠오른다.
주만은 마치 두억시니에게나 홀린 사람 모양으로 걸어간다느니보담 차라리 끌리듯이 탑으로 한 자국 두 자국 다가들었다.
문득 탑에만 어리인 그의 눈앞에 난데없는 검은 그림자가 얼른 하고 지나간다.
주만은 깜짝 놀라며 몸을 소스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