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009

얼마 만에 아상노장을 따라 젊은 석수는 나타났다.
꾸미지 않은 옷매무새며 오래 손질을 않은 탓으로 까치집같이 헝클어졌으되 윤나는 검은 머리며 두루미처럼 멀쑥하게 여윈 몸피를 얼른 보는 순간 주만의 가슴은 웬일인지 찡 하고 울린다.
그는 이런 자리는 난생 처음이라 어찌할 줄을 모르고 먼발치에서 머뭇거릴 제 왕은 가까이 오라는 분부를 내리셨다.
그는 몇 걸음 더 다가들어 와서 어색하게 허리를 굽히는데 그 고개는 땅에 닿을 듯이 숙였다.
"얼굴을 들어라." 젊은 석수는 한참 망설이다가 분부대로 머리를 들었다.
번듯한 이맛전, 쭉 일어선 콧대, 열에 뜬 것 같은 붉은 입술, 더구나 가을 호수를 생각게 하는 맑고 깊숙한 눈자위, 제아무리 천하명공이라 하더라도 한낱 시골뜨기 석수장이로 이렇게 청수한 풍채와 씩씩한 품위가 있을 줄은 몰랐다.
젊은이 축의 곁눈질하는 눈초리에는 흠모의 빛이 역력히 움직였다.
주만은 그의 얼굴과 풍골에 다보탑의 공교롭고 아름다운 점과 석가탑의 굵고 빼어난 맛이 쩍말없이 어우러진 듯하였다.
"어쩌면 재주도 그렇게 좋고, 인물도 저렇게 잘났을깝시오."
멍하니 석수를 바라보던 털이는 주만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재재거린다.
주만은 그런 소리는 귀에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듯이 아무 대꾸가 없다.
"아가씨, 구슬아가씨, 저 연연한 입술을 봅시요. 마치 연지를 찍은 듯……."
주만은 듣기 싫다는 듯이 그 가느나마 숱 많은 눈썹을 찡그린다. 털이는 제 아가씨의 눈치도 볼 새 없이 제 눈은 그 석수의 얼굴에서 떼지도 않으면서 노상 종알거린다.
"아이그, 가엾어라. 그 탑을 쌓느라고 얼마나 애간장을 졸였기에 저렇게 말랐을까. 저 뺨에 살점이나 붙었던들 작히나 더 의젓하고 엄전할깝시오."
주만은 털이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왕은 이윽히 석수를 바라보시다가,
"얼굴도 준수하다."
칭찬하시고,
"이름은 무에냐?"
"아사달(阿斯嫤)이라 부릅니다."
맑고도 씩씩한 목소리다.
"부여에는 부모가 있느냐."
"아비와 어미가 다 없습니다."
"그러면 형제는 있느냐."
"동기도 없삽고 스승의 집에서 자라났습니다."
"스승은 누구냐."
"부석이라 합니다."
"지금도 살았느냐."
"예, 살아 있습니다마는 벌써 칠십이 넘어 걸음도 잘 걷지 못합니다."
털이는 끝끝내 재잘거린다.
"보고 또 보아도 참 잘난 얼굴. 그 검은 머리는 옻빛 같고……."
주만은 잃었던 정신을 수습하려는 사람 모양으로 눈을 떴다 감았다 하다가 털이를 돌아보며,
"네 눈에도 그렇게 잘나 보이느냐."
마지못해 대꾸를 해준다.
"왜 쇤네 눈은 눈이 아닌갑시오. 저 목소리를 들어 봅시요. 어쩌면 저렇게 청청해요."
"맑고 부드럽고……." 하고 주만은 속에 가득한 것을 내뿜는 듯이 숨을 크게 내쉰다.
털이는 또 말끝을 이어,
"우리 서라벌에도 저런 인물이 쉽지 않겠습지요."
"우리 서라벌에 저런 인물이 있을 말로야."
하고 주만은 연거푸 한숨을 쉰다.
"왜 우리 서라벌에 그런 인물이 없기야 한갑시오. 첫째로 금공자가 계신데."
금공자란 말에 주만의 아름다운 얼굴은 별안간 흐려졌다.
금공자라 함은 시중 금지의 아들 금성(金城)을 가리킨 것으로 주만과 혼인말이 있는 귀공자다.
"금공자 따위야."
"왜요, 키가 조금 작으시지만 얼굴이 희시고 싹싹하시고 재주 있으시고……."
"얘, 입 고만 놀려라. 듣기 싫다. 그 키가 작기만 한 키냐, 곱추지."
"그래도 당나라까지 가셔서 공부를 하시고 한문이라든가, 진서라든가, 그 어려운 글을 썩 잘하시고, 당나라 벼슬까지 하시고……."
"그까짓 당나라 공부가 그렇게 장하냐. 그 어수선한 글자나 잘 알면 무슨 소용이 있을꼬."
"금시중 대감이 세도가 당당하시고……."
"세도가 나한테 무슨 상관이냐."
하고 주만은 화를 버럭 낸다. 털이도 제 아가씨의 비위를 너무 거슬린 것이 죄송하다는 듯이 입을 다물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