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006

불국사의 저녁 나절.
연옥색 하늘을 인 토함산 꼭대기 너머로 너붓이 내다보이는 담회색 구름장은 서쪽으로 향한 송아리가 햇솜처럼 눈부시게 피어난다. 산기슭 울창한 송림은 푸른 기름이 질질 흐르는 듯.
절 앞 넓고 넓은 못은, 바람도 없건마는 제 흥에 겨운 듯이 찰랑찰랑 몰려 들어와 새로 쌓아 올린 석축에 부딪는다. 바그를 흰 물꽃을 날리고 갈길을 몰라 쩔쩔매는 듯하다가 더러는 수멸수멸 뒷걸음을 쳐서 멀리 물러가고, 더러는 옆으로 빙그를 돌아 청운교 연화교 가를 더듬더니 마침내 돌로 튼 홍예문을 찾아내어 앞을 다투며 몰려 나가서는 어지럽다는 듯이 뱅뱅 돈다.
저 건너 언덕에는 그림배 여러 척이 매였다. 물결이 일렁대는 대로 자줏빛 남빛 누른빛, 비단 휘장이 한가롭게 펄렁펄렁한다. 그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화려하고 뱃머리에 여의주를 문 청룡이 꿈틀꿈틀 움직이는 배는 아마 임금을 모실 배이리라.
물새 몇 마리가 너울거리는 날갯자락을 적실 듯 적실 듯하며 물얼굴을 스쳐 난다.
그 긴 부리로 넝큼넝큼 송사리 따위를 잡아 삼키다가, 별안간 놀란 듯이 그 반질반질한 작은 몸을 솟구쳐서 높이높이 공중으로 사라진다.
입실(절 어구) 부근에서 들리는 인기척이 떠들썩하게 가까워 오는 까닭이리라.
거둥이 듭신 것이다.
모든 준비를 마쳐 놓고 웃두리중들은 영접차로, 아랫두리중들은 구경차로 절을 텅 비우다시피 하고 들끓어 나왔다가 인제야 제각기 제 맡은 소임을 생각하고 줄달음질로 들어오는 것이다. 어지러운 그림자, 허둥거리는 바쁜 걸음. 종용하던 공기는 흔들렸다. 찢어질 듯이 긴장한 가운데 물끓듯 워글워글한다. 미행이라 하였지만, 도리어 화려하고 가족적인 단란한 거둥이었다.
왕은 젊으신 왕비 만월부인과 후궁 비빈을 거느리셨고 배종하는 몇몇 대관들도 왕명을 받들어 그 부인과 딸들을 데리었다.
이번 거둥은 기실 젊으신 왕비께서 오래 불국사 구경을 못 하시어 한번 소창을 하시자고 낙성이 되기 전이건만 왕을 조르신 까닭이다. 안압지 서줄지의 뱃놀이도 좋지마는 절 안으로 저어드는 불국사의 그림배엔 버리지 못할 풍치가 있었다. 더구나 이번에 새로 이룩된 다보탑이 세상에도 진기하다는 소문을 들으셨음에랴.
기름 같은 물결 위에 그림배는 꼬리를 맞물고 술렁술렁 떠나간다.
배가 기우뚱기우뚱, 번쩍번쩍하는 금관이 물 속에 흔들리자, 수없는 구옥이 어지럽게 춤을 춘다. 희빈들의 어여쁜 얼굴들이 연꽃송이처럼 둥둥 떴다. 실바람에 나부끼는 구름조각과 같이 아른아른한 깁옷자락도 흐른다. 간댕간댕하는 황금 귀걸이와 구실 목걸이가 물거품 사이로 숨기잡기를 한다.
실바람을 따라 고귀한 향기가 그윽이 풍기었다.
중류를 지나자 길게 누운 으리으리한 전각의 그림자들이 소리 없이 부서졌다.
동쪽으로 청운교 백운교, 서쪽으로 연화교 칠보교가 뚜렷이 나타난다. 불국사 자랑의 하나인 돌사다리다. 번들번들하게 대패로 밀어 놓은 듯한 층댓돌과 그 층층 상하에 손잡이 돌이 우뚝우뚝 서고, 그 머리에 구멍을 뚫어 늘어뜨린 은사실을 바라보고 배 안에서는 경탄의 속살거림이 일어났다.
"얘 털아, 참 아름답기도 하고나."
꽃 같은 희빈들 중에도 뛰어나게 아름다운 웬 아가씨가 맥맥히 돌사다리를 바라보다가 제 옆에 앉은 시비에게 소곤거렸다. 그는 은실 금실로 수놓은 끝동 소매를 조금 치켜서 옥 같은 손으로 뱃전을 짚고 그 날씬한 허리를 반나마 배 밖으로 기울였다.
"어쩌면 돌층층대를 바로 물 속에 만들었어요, 구슬아가씨."
털〔毛兒〕이란 시비는 그 동그란 눈을 더욱 동글게 뜨며 맞방망이를 친다.
"그보담도 저 웃사다리와 밑사다리 어름을 좀 봐라. 그 밑에 돌로 홍예를 튼 것이 보이지 않니. 물결이 그 조그마한 홍예 안으로 들락날락하는 게 가지고 놀고 싶구나."
구슬아가씨란 이의 그 거슴츠레한 눈은 황홀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