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005

"그래, 차돌아, 그 어른이 어느 때 일을 하시던." 떠는턱은 또 한번 재촉을 한다.
차돌은 그 총기 있는 눈을 깜박거리며 여러 스님을 돌아본다. 이런 자리에 말을 하기가 주눅이 드는 듯, 그 여상진 흰 얼굴을 살짝 붉힌다.
"어서 얘기를 하려무나. 갑갑하구나. 본 대로 말을 못 해―---"
원주는 벌써 호령조다.
차돌은 잠깐 고개를 갸우뚱하고 어디서부터 허두를 내어야 옳을지 몰라 망설이는 듯하다가 가느나마 차근차근한 목소리로 말을 끄집어내었다.
온 방의 귀와 눈은 차돌의 입술로 몰리었다.
"언젠가 제가 새벽녘에 잠을 깨었지요. 그래 무심코 아랫목을 보니까, 그 어른이 누워 계시던 자리에 그 어른이 계시지를 않겠지요. 뒷간에나 가셨나 하고, 그냥 쓰러져 누우려다가 웬일인지 그날은 잠이 설들어요. 암만 기다려도 그 어른은 오시지를 않고, 휘저엇한 게 어쩐지 무서운 생각이 나요……." 하고 차돌은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인다.
"옳지, 그래 어린것이 무섭기도 하겠지. 그래, 그래서……."
떠는턱이 연방 재촉을 한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가 아마 작년 겨울인가 봐요. 눈보라가 몹시 쳐서 문풍지는 덜덜 떨고…… 잠은 점점 달아나고 무섭기는 하고, 그래 제가 일어나서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 옹크리고 있노라니 눈보라가 버석버석 창에 부딪히는데 어디선지 이상한 소리가 들려 와요. 쩡쩡…… 그때 '석' 하시는 스님은 아직 안 나오시고 온 절 안이 괴괴한데 이 난데없는 소리를 듣고 저는 간이 콩만했다가 겁결에도, 오 옳지 이 어른이 이 눈 오시는 새벽에도 탑을 지으시나 부다 하는 생각이 문득 들겠지요!"
"오, 그래서."
어느결엔지 아상노장이 눈을 떠서 귀여운 듯이 차돌을 바라본다.
"제가 그대로 뛰어나와 버석버석하는 눈 위로 줄달음질을 쳐서 탑 모시는 곳으로 올라가 보았지요. 새벽이라 해도 아직 날이 덜 새어서 어둑어둑했지만 눈길은 환했습니다. 올라가 보니 아니나다를까 그 어른이 정을 들고 한참 바쁘게 일을 하시더군요. 제가 곁에 가도 사람 오는 줄도 모르시고 머리에 등에 눈을 뒤집어쓰신 채 정과 망치를 번개같이 놀리시겠지요. 거기가 워낙 바람 모지가 되어서 저는 얼마를 서 있지를 못해 귀가 떨어져 달아날 것 같고 발이 쓰리고 온몸이 덜덜 떨려서 '에이 추워' 소리가 저절로 나와 버렸습니다. 그제야 그 어른이 놀란 듯이 저를 돌아보시는데 그 얼굴에는 구슬 같은 땀이……."
"그 추운데 땀이……."
누가 감탄을 한다.
"저는 숨길도 얼어붙을 것 같은데 그 어른의 비 오듯 하는 땀을 보고 정말 놀랐어요. 그 어른은 저를 보시고 빙그레 웃으시며 '추운데 왜 나왔니. 어서 들어가거라. 감기 들라.' 그래도 제가 머뭇머뭇하고 섰노라니 '오, 네가 혼자 무서워서 나온 게로구나.' 마치 제 속을 들여다보시듯이 말씀을 하시고 저를 데리고 내려오시는데, 저는 오금이 얼어붙어 댓 자국을 못 옮기겠는데 그 어른은 여상스럽게 걸어오시겠지요. 참 신통력을 가지신 어른이에요."
일좌의 얼굴에는 감동하는 빛이 흘렀다.
"그래, 그 후에도 일하는 걸 또 본 적이 있니."
원주가 종주먹을 댈 듯이 묻는다.
"보고말고요. 낮에 틈틈이 일하시는 것도 저는 가끔 봅니다마는 사람을 기하시는지 인기척만 나면 곧 일을 중지하시지요. 요새도 꼭 밤을 새우시는걸요. 아침이 되어 여러 스님이 일어나실 때쯤 해야 처소로 돌아오셔요. 제 귀에는 밤중에도 정소리가 역력히 들려 와요."
"참말 명공은 명공이야."
"천수관세음의 현신이시어."
"그런 명공을 얻은 것은 첫째 부처님의 법력이시고 둘째 우리 절의 복이야."
"아니 우리 신라의 복이지."
제가끔 떠들 때에 차돌은 갑자기 손으로 제 귀를 기울이며,
"가만히들 계셔요. 자, 자, 저 소리를 들어 보세요. 저 소리를." 나직하게 속살거린다.
여럿은 귀를 기울였다.
무슨 소리가 그윽이 그윽이 들려 온다.
여럿은 숨소리를 죽였다. 귀가 쏠리면 쏠릴수록 그 소리는 더욱 또렷또렷해진다.
똑 똑 바로 추녀 끝에서 완연히 낙수가 떨어지고 자그륵 자그륵 연잎에 급한 소나기가 지나가는 듯하다가 문득 찡 하고 우람한 울림이 지동처럼 울려 온다.
성기고 배게, 느리고 자지러지게, 높으락낮으락 그 소리는 저절로 미묘한 곡조를 이루어 쪼는 이의 신흥을 가르쳐 준다.
여럿은 말없이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소리 오는 곳을 눈익혀 보려는 것처럼.
바깥은 옻빛같이 캄캄하다.
"이렇게 어두운 밤에……." 일동은 서로 돌아보았다.
그 이튿날 뜻밖에 위로 고마우신 분부가 내리었다. 대역이 끝나기 전이니 어엿한 거둥은 못 하셔도 다른 절에서 불식을 마치신 후, 미행으로 듭신다는 분부다.